전 물리학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물체에는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쯤은 압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물리법칙을 떠오르게 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겐 각자의 중력이 존재한다는 듯한 암시 말이죠.
테레자를 움직이는 건 자신의 육체가 지닌 무거움과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테레자에게 몸과 정신 간의 이질감은 익숙하죠. 토마시에게는 개개인의 육체에서 추출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에 반응하는 것. 이는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그의 직업과 무수한 여자들의 육체를 거치는 그의 행위를 뒷받침합니다.
사비나의 중력은 누군가의 기대나 예상을 배반하는 것이고, 프란츠에게 중력은 사람들을 군중으로 묶어두는 이념과 그것을 응축한 역사로 요약됩니다. 곧 이들 넷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실상 각자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틀이 다르기에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해석하죠.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듭니다.
몸에 대해 뻔뻔함으로 일관해온 엄마 밑에서 자란 반동 탓일까요. 테레자는 자신의 몸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녀에게 몸은 영혼이 어줍잖게 넘어진 탓에 걸려든 덫이죠. 그런 이유로 그녀는 원치 않는 때 뱃속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만큼 제 몸을 수치스럽게 느낍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육체를 내던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립니다.
반대로 토마시에게 육체는 하나씩 공들여 읽어내려가야 할 목록입니다. 지상에 걸어다니는 몸은 그에겐 탐독해야 할 대상. 곧 세상에 넘치는 여성들의 육체는 몸에 대한 그의 탐구심을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소진시키는 대상입니다. 그는 환자가, 여성의 육체가 자신의 정신을 축내는 줄 알면서도 그 다음 대기표를 끊은 환자를 맞이하고, 또 새로운 여성을 만나러 떠납니다.
프란츠와 사비나는 어떨까요. 프란츠는 소련에 억압 받고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보헤미아 출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갖습니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며 보내는 자신의 삶은 진짜 인생이 아니라고, 진짜 인생은 역사를 만드는 거리에 있다고 여기죠. 반면 사비나는 큰 물줄기와 같은 역사적 드라마는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개인의 내밀한 삶에 있다고 느끼죠.
이렇게 다른 두 사람에게는 여행에 대한 의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프란츠에게 여행은 ‘일탈로서의 사랑’이지만, 유목민 같은 삶을 살아온 사비나에게는 일상에서의 밀회야말로 에로틱한 사랑입니다. 3부의 ‘이해받지 못한 말들’은 이처럼 자신의 관점에 따라 살아가는 인물들이, 바로 그 때문에 상대의 말과 행동을,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좌표 위에서 점처럼 마주칠 뿐, 같은 선을 공유하진 못하죠.
이 소설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자신 삶의 논리와 너무나 거리가 먼 타인의 삶에 자신을 항복하고, 내맡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각자 인생을 살아가는 논리가 어떠하든, 사랑은 상대의 삶의 방식에 투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토마시는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테레자의 무거움을 <감당>했고, 프란츠는 사비나와 헤어진 뒤에야 그녀의 가벼움을 <감각>하게 됩니다.
한편 사비나는 프란츠에게 ‘가장 평범한 여자들이 하는 말(166p)’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합니다, 프란츠는 사비나가 사라진 이후에야 그녀 삶의 방식이었던 자유가 주는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테레자와 토마시가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만들어갔다면, 사비나와 프란츠는 헤어진 뒤에야 서로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서 사랑을 깨닫게 되죠.
관계에 대한 강의로 유명한 김창옥 교수의 강의를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그는 ‘연애는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사랑을 할 지 알아보는 과정’이라고 전했습니다. 곧 연애는 저 사람의 짐을 감당할 지 살펴보는 과정이고, 사랑은 그 사람의 짐과 동행하기로 하는 결정이자 실천이라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얼마나 연애에 충실했고, 동시에 사랑의 초입에서 여러 번 이탈했는지 생각합니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p202)’입니다. 그래도 서른 네 해를 지나면서 저는 제 삶에 작용하는 중력과 숙제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한 커플의 사랑 이야기는, 각자 인생 숙제를 짊어진 두 사람이 서로의 숙제를 책갈피 펼치는 냥 뜨문뜨문 공유하면서 해당 소절을 듣고, 질문하고, 이해하고, 오해하는 과정 전체가 아닐까요.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되는 어떤 사랑은, 그 덕분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p205)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2009)
*이번 호는 작가 인터뷰 대신, 작품에 대한 감상문으로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