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충돌. 당신이 떠올리는 사랑의 이미지는 어느 쪽에 더 가깝나요. 평온과 격정, 이런 표현으로도 치환 가능합니다. 대개 전자와 후자를 어느 정도 배합한 형태일 거예요. 그리고 관능적 사랑의 대부분은 안정보다 충돌의 비중이 크죠.
프랑소와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속 루실과 앙투완의 사랑 역시 후자에 가깝습니다. 사람 가득한 파티장에서 서로 웃음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느끼고 연인이 됩니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두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합니다. 각기 다른 기질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을요.
사강의 <패배의 신호>는 한 철 같은 사랑을 그립니다. 분량 면에서도 가장 달뜬 계절인 여름은 몇 페이지를 할애한 것이 고작. 반면 쇠락해가는 둘의 사랑은 가을 내 단풍이 제몸 터질 정도로 벌개졌다가 수분 하나 없이 바스라지고, 발밑에 짓이겨지는 면면을 많은 페이지에 걸쳐 할애합니다. 그 덕에 우리는 사랑이 끝나가는 과정 전체를 낱낱이 지켜보게 되죠.
사람은 저마다 내적 도덕을 지닙니다. 내적 도덕이란 한 마디로 자신이 온전한 감각이자 스스로에게 진실된 상태입니다. 내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정확하겠네요. 곧 내적 도덕에 부합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세계와 이질감을 느낄지언정 소외감을 느끼진 않습니다. 최소한 ‘내’가 나 자신의 동반자로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루실의 내적 도덕은 ‘붙잡히거나 고정되지 않음’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치면 ‘바람’과 같죠. 바람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고 어디에도 머물 수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자유라고도 부를 수 있겠죠. 루실의 명랑함은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그녀의 상태에서 나옵니다.
앙투완의 속성은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음’입니다. 그의 속성을 물질 세계에서 끌어온다면 완고한 벽돌벽 같은 게 아닐까요. 그는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상황에 자신을 맞추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성정이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집니다. 큐피드가 놓은 덫에 걸려들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죠.
바람을 닮은 루실의 성정은 샤를과는 잘 합치됩니다. 부유한 부동산 중개사인 샤를은 뭐랄까요, 드넓은 부지를 소유한 고성의 소유주 같달까요. 그의 고성에는 성벽도 있지만, 정작 문에는 빗장이 걸려있지 않습니다. 곧 ‘바람’인 루실은 샤를의 ‘덧문 없는 고성’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죠. 루실은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샤를에 안정감을 느낍니다.
루실과 샤를의 속성 각각이 섞여들 수 있는 것과 달리, 디안과 앙투안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자존’으로 자신을 지켜온 디안과 가부장과 유사한 남성적 이미지에 자신을 바쳐온 앙투안의 속성은 공존이 불가능하죠. 디안을 사물로 빗대면 흠결 없는 매끈한 거울 아닐까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또 다른 타인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디안 뒤로 누군가 슥 들어와 그녀에게 모욕을 가한들 거울을 그녀쪽으로 돌리면 그만이죠.
둘의 육체를 뒤섞게 하는 에로스의 장난은 이들에게 장기 투숙하는 호텔처럼 서로의 곁에 체류할 임시키를 발급해 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침대를 벗어나 각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흔히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비유되는 나신은 하루에 옷을 벗는 시간만큼이나 찰나인 맨살덩어리일 뿐일지 모릅니다.
맨살만으로 부대낄 수 있는 기간은 한시적입니다. 루실과 앙투안의 <기간 한정 사랑>을 지켜보면서 관능이 발휘됐던 열정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관능 이후 기어코 애인과 마찰을 일으키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던 순간들을요. 자신의 내적도덕이 발현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 될 때 말이죠.
속성이 다른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이건 좀 이상합니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에서 엠버와 웨이드는 손을 맞잡고 상대의 열기를, 습기를 감당해내고 기적을 일으키던데 말이죠.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은 디즈니 세계에서나 가능한 걸까요?
*이번 호는 작가 인터뷰 대신, 작품에 대한 감상문으로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