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2. 작업에서 비비드한 컬러와 뉴트럴톤 컬러의 만남이 주는 충돌감에 매료되었는데요. 점성이 느껴지다가도 힘있게 떨어지는 선의 조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작업할 때 몰두하거나 고심하는 부분이 있는지요.
A2. 처음 작업을 시도할 땐 즉흥성을 유지한 채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감각에 집중하려고 해요. 놓치는 것 하나 없이, 그려내려는 순간의 먼지 한 톨까지 기억 속 감각을 이끌어내요.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이 온전한 전부가 아님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삭제되고 있잖아요. 이런 사실을 직면할 때마다 조금 슬퍼져요.
내게 얼마 주어지지 않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너무 짧고, 얕고, 흐려요. 시공간의 틈에 갇혀 영원히 안식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죠. 제 그림을 바라볼 때 제 스스로 이런 기분을 느끼길 바라요. 관객도 자신 역시 그런 순간이 있었음을 자각하길 바라고요.
Q3. 작가님의 작업을 모두 좋아하지만, 여러 레이어를 겹친 듯한 작업이나 페이퍼 커팅에 빛을 결합한 작업이 일으키는 감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탐구해보고 싶은 물성이나 표현이 있을지요.
A3. 앞서 언급한 즉흥 작업의 진화 버전인데요. 했던 작업을 다시 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존 작업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아날로그 작업을 디지털 작업으로 만들거나 그 반대로 하는 작업이 예가 될 수 있겠죠. 혹은 페이퍼 커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어니언 스킨*을 모두 합쳐 보는 시도들도 해당합니다. 촬영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지점을 포착해 표현하는 식이죠. (*그림에 광원을 두거나 투명도를 활용해 그림을 레이어처럼 합쳐보는 기법)
이전 작업을 오래 바라보다가 결과물이 만들어진 경우인데요. 만일 이전 작업을 마치 자신의 흑역사나 실패작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과정을 꼭 해보셨으면 해요.의외로 흥미롭거든요! 한 이미지가 갖는 입체적 모습을 다양한 재료를 통해 표현하는 일을 ‘자기공부’ 차원에서 지속하려고 합니다.
Q4. 작가님의 작업에 생동감을 불어놓는 일상 속 사건(사물, 사람 등 무엇이든)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영감을 주는 일이 있을까요.
A4. 단어로 표현하자면 ‘음악작업실’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은 특정한 음악을 느끼는 감각 회로로 예술적 영감을 얻습니다. 제게도 음악은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고요.음악 작업실은 마치 거대한 스피커 안에서 소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눈으로 살피고 느낄 수 있는 밀실과 같습니다.그런 음악을 처음 느꼈을 때의 잔잔한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요. 그런 느낌을 처음 안겨준 사람이 현재의 여자친구입니다.
Q5. 작가님은 문화매거진에서 칼럼도 연재하시는데요. 작가님의 글에서 상대방의 기쁨에 전이되는 과정을 표현한 대목에서 일종의 관능을 느꼈습니다. 연인 사이에서의 관능적 순간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A5. 여자친구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는데요. 그 순간 벅차올라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나요. 어떤 말도 당시의 저 자신을 대변할 수 없기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끝까지 차 올랐죠. 너무 생소한 느낌이라 온 감각을 집중해 당시를 기억하려고 했어요. 막 세상을 처음 보기 시작한 아기처럼요. ‘관능’이라는 단어와는 안 어울릴 수도 있지만, 본능 비슷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요. 이런 순간을 더 연구해보고 싶어요.
Q6. 작가님 작업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함의 원형은 무엇일까요.
A6. 기본적으로 선에서 많은 무드를 담아내려고 해요. 한 개의 선을 그리려고 작업을 멈추고 음악을 한 시간 듣고 오는 등 리프레쉬를 할 때도 있어요. 혹은 그냥 작업을 중지하고 몇 주 지난 뒤 그 이후의 선을 그려내기도 하고요. 하얀 도화지 속 남겨진 흔적 한 개 한 개에서 시간을 느끼길 바랍니다. 제가 고민한 흔적도, 그 사이 감정들도요. 고작 터치 하나에 모든 걸 담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작업할 때 그런 점을 인식하는 편 같아요. 그렇게 모인 선들이 그림 안에서 속도감을 자아낸다고 생각해요. 빠른 터치와 느린 터치가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며 만들어낸 시각적 자극. 에로틱함은 거기서 오는 것 같아요
Q7. 작가님이 꼽는, 단연 에로틱한 작품이 있다면요?
A7.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최근 3년간 그린 그림을 다 찾아봤어요. 조금 어이없게도 2021년 7월 31일에 그린 낙서더라구요.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색연필을 죽죽 그어 나간, 말 그대로 낙서예요. 이걸 꼽는 이유는 제가 그 순간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거예요. 많은 것이 변화했고, 각자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만, 항상 함께 무언가 그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잠깐 멍해지는 순간을 향한 그리움. 또 그 순간 안에서, 그 순간을 그리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땐 더 많은 시도를 해 보고 싶어요.
Q8. 지난 4월 알렉스룸에서 열린 작가님의 전시는 '물괴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소개한 물괴기 이야기는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사는 인어의 성질에 대해 담는데요. 양쪽을 넘나드는 인어의 특성은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를 표현함과 동시에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혹시 작가님께 경계란 어떤 의미인지들을 수 있을까요.
A8. 사랑은 경계를 무력화시키는 일이에요. 그렇기에 매력적이죠. 경계는 일종의 자기항상성이라고 봐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렇게 보면 사랑은 그에 반하는 행위죠. ‘물괴기 이야기’ 에서의 바다와 육지에 대한 경계는 성소수자의 차별적 대우를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지만 줄곧 물속에서 살아오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낭만적 이끌림을 담고 있기도 해요. 편안한 환경은 물속이지만 내가 가 보지 않은 무한한 육지를 불가항력적으로 동경하게 되는 마음.하나씩 알아가게 되는 다른 영역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시작과 닮아 있어요.
Q9. 사랑과 욕망에 대해 한 마디 부탁드려요.
A9. 사랑은 순수해 보이고 욕망은 불순해 보이지만 둘은 결국 같은 단어 아닌가요? 욕망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해요. 사랑이 정상적이듯 욕망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야 해요. 이건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자 제게도 반복적으로 말하는 메시지에요. 전 제 욕망을 놓치지 않고 분명히 드러내고 싶어요.
사랑은 자기항상성을 넘어서 경계를 무력화하는 일.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인어를 설명하는 말로 이만한 것이 없었는데요. 그녀의 그림에서 느끼는 관능성은 한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당 내용은 김태이 작가님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 되었습니다. *모든 그림은 김태이 작가 인스타그램. (@tae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