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최정수 역, 문학동네, 66쪽
뒤늦게 <밀회>를 봤다. 극중 혜원과 선재가 처음 사랑을 나눈 날, 혜원은 선재가 잠든 틈을 타 옥상에 올라 집에 있던 육개장을 먹는다. 초가을처럼 보이는 계절. 다리를 접어 모으고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서울 주택 위 내려앉은 밤 야경을 내려다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게도 그런 음식이 있다. 육개장 보다는 배로 비싸지만 비교적 간편식에 가까운 샌드위치가 그렇다. 출근할 때 간혹 ‘오늘 시간 없겠다’ 싶을 때면 파리의 아침에 들러 그 안에서 옵션을 고른다. 삼지선다로 식재료를 고르면서 사치라 여긴다. 닭가슴살과 크랩, 에그를 번갈아 보면서.
그런 샌드위치가 한때는 밀회의 상징이었다. 지하철에 몸을 싣기 바쁜 상대를 생각해 조금 더 여유나는 사람이 챙겨두는, 허기를 방비하는 준비물. 그 덕에 우리는 같은 시간 서로를 맘 편히 뒤섞을 수 있었다. 포터블한 음식이 꽤 로맨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객실 문을 열기 전 그가 품안에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쥐어준 순간이 떠오른다. 먼저 도착한 내가 급한 성질을 죽이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그가 도착하자마자 대뜸 샌드위치부터 먹으라고 종용했던 기억도.
꽤 많은 사건들이 본론보다 그 앞뒤의 인상으로 남는다. 그날의 섹스는 알지 못한다. 기억나는 건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괴었던 팔꿈치에 닿은 싸구려 나무 원탁의 느낌과 손바닥을 꽉 채운 샌드위치를 싸맨 랩핑의 감각 뿐.
우린 취향 공동체 아니었을까. 핸디한 음식으로 위장을 채우는 열정이라는 사치에 매료된 두 사람. 먼저 목욕물을 데워두고, 양상추 빠진 샌드위치를 옆구리에 끼워주는 남자를 기꺼워하는 여자라서. 그는 그래서 그녀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이번호를 기점으로 에로십 뉴스레터는 여름까지 쉬어갑니다.
이미지 출처 Andrew Valdivia @unsplas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