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를 좋아합니다. 영화 <탑> 송선미의 대사처럼 ‘거슬리는 대사’가 없거든요. 사람들의 말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인 정서를 공유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웃음과 끄덕임, 찌푸림과 묵묵함으로 채워집니다. ‘그렇지’ ‘맞지’ ‘그런 게 있지’ 등. 인칭대명사와 앞말을 그대로 받는 수동어로 가득합니다. 만약 AI에게 이들의 대화를 해석하라고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아마 이는 뼈를 발라내려고 계속 살을 발라냈으나 뼈는 없는, 오로지 살로 이뤄진 형체 없는 본질 같을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기에 그들의 말이, 편안하다는 겁니다.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아도 곁에 존재하는 공기처럼, 한 블록 한 블록 돌 때마다 시선이 밟히는 팝업 스토어가 가득한 동네를 떠올립니다. 반면 붉은 벽돌색 빌라에 굴림체 빌라명이 친근한 당인동, 혹은 스테인레스 은색에 세리프체의 블랙 폰트가 떠올리는 한남동 카페 거리 등. 이렇게 떠오르는 어떤 풍경처럼 선선히 다가오죠.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도 그런 대화를 보여줍니다. 소설은 철거를 앞둔 오래된 상가를 중심으로 해당 상가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라는 남녀가 변화하는 환경에서 서로의 정서를 공유하는 소설인데요. 이들의 대화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설 속에 흔히 보이는 따옴표가 없다는 겁니다. 곧 소설을 스르륵 읽으면 어디까지가 무재씨가 말했는지, 어디서부터 은교가 말했는지 경계가 모호하죠.
두 사람의 대화는 미끄러집니다.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물방울이 펴져가는 모습처럼 어디서부터 젖었고 어디서부터 젖지 않았는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앞말과 뒷말 사이에는 쉼표가 있고, 뒷사람은 그 비약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잇죠. 앞사람은 특별히 의견을 구하거나 답변을 요하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독백처럼 단상을 읊조립니다. 그럼 뒷사람은 설명이 생략된 앞사람의 생각을 훑어내려 가기 위해 말끝을 반복하거나 잠시 뜸을 들인 뒤 수긍을 하죠. 이 둘의 대화엔 앞서가는 법도, 대응하려는 발빠름도 없습니다. 이들의 언어는 느슨하게 앞말을 이어주는 인칭대명사와 ‘그래서’ 같은 접속어로 채워집니다.
언젠가 멀어졌던 지인을 떠올립니다. 제게 퍽 잘해줬던 분이었는데 어느샌가 불편한 감정이 들어 멀어졌는데요. 그녀는 제가 무슨 말을 하면 문장에 마침표가 땅을 디디기도 전에 말을 받아쳤습니다. 동의를 하든 반박을 하든 문장부호에 마침표가 떨어지기도 전에 쫓아왔죠. 문득 이때의 대화가 은교와 무재의 대화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생각합니다. 그 가뿐 호흡에 이미 제가 던진 서브에 대응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반갑고 고맙기 보다는, 이미 던진 공을 내려놓고 싶은 맘만 생겼더랬죠.
제 동료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동조’가 싫다고 했습니다. 어ᄄᅠᆫ것이냐고 묻자 말 끝마다 급
하게 ‘그렇죠, 맞죠’ 하고 급하게 동의하는 경우라고 했는데요. 정작 하나 더 나아간 질문을 하면 갸우뚱하거나 말문이 막혀 하는 모습에 ‘아는 척’ 신물이 난다고요. 어쩌면 상대의 지식에 수준을 맞추고, 상대의 관점에 동조해야 잘 보일 수 있다는 강박에서 오는 건 아닐까요. 그에게 거슬리기 싫은 마음이 간격없는 대화를, 성급한 동조를 부르는 건 아닐지요.
연기는 오로지 리액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개인의 주관과 확고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바보가 되지 않으려고 대화에서도 발버둥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와 연인의 대화, 혹은 저와 친구의 대화를 떠올립니다. 마땅히 그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모를 때, 혹은 나의 생각이 있지만 내뱉기엔 확신이 없을 때 저는 ‘그런가아’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 애인은 잘난 척 하는 제말에 별다른 대꾸없이 두 마디를 이어붙이죠. ‘어렵네’ ‘애매하네’. 어쩐지 어리숙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지 쯧쯧 싶게 하는 말하기입니다.
어쩐지 이런 대화는 대화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 마주 보고 테니스 채를 든 채 랠리를 하려고 서 있는 두 주자가 아니라, 저 혼자 채를 들고 던지면 상대는 푹신한 쿠션으로 변해 제가 던진 공을 먹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쿠션으로 떨어진 제 말은 반문 없이 쿠션의 ‘그런가아’로 떨어집니다. 때로 어떤 대화는 대화가 되지 못한 채 한쪽에만 무수히 덜어진 공처럼 남아있습니다. 아마 이 대화를 그림으로 옮기면 한쪽에만 무수히 떨어진 공이 가득할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자리로 가서 공을 들여다볼 겁니다. 진짜 그런가? 하고요.
어쩌면 대화란 서로가 맞수가 되어주는 라이벌 같은 구석도 있지만, 내가 던진 말을, 혹은 말의 파편을 한 번쯤 시간을 두고 들여다 보게 하는 상대의 여유에서 나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아둔하고 어수룩한 ‘그런가’하고 혹은 ‘그런가 보다’ 하고.
쾌락과 지성이 공존하는 뉴스레터,
에로스를 뒤쫓는 모험은 계속됩니다.
궁금한 민지 드림